쓰리(3)金(김) 시대 마지막 정치인으로 살다 끝내 세상 떠나

김종필 전 총리, 한국 정치사 눈으로 지켜본 원로 정치인<사진=김정환기자>

[노동일보] 김종필(JP) 전 국무총리가 23일 향년 92세로 별세했다. 김 전 총리는 한국의 정치사를 눈으로 지켜본 원로 정치인이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함께 정권을 장악했으며 전두환 대통령, 노태우 대통령, 김영삼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 이명박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 그리고 현재의 문재인 대통령의 정치를 보며 한국의 정치사를 걸어왔다.

이에 YS 김영삼 대통령, DJ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쓰리(3) 김이라고 일컬어진 가운데 JP 김종필의 이름을 마지막으로 남기며 쓰리(3)金(김) 시대의 마지막 정치인으로 삶을 살다 끝내 세상을 떠났다.

여기에 1(일)인자에 들지 못하며 영원한 2(이)인자 소리를 듣다가 떠난 김 전 총리는 양면의 모습으로 국민들이 기억하고 있다.

김 전 총리는 군사 독재 정권의 2인자로 한국의 민주화를 가로 막은 정치세력의 중심 인물, 군사 정권 유지를 위한 인권탄압 인물, 3당합당으로 정권을 유지하며 한국정당을 퇴행시킨 인물, 충청권이라는 지역기반으로 지역 정치를 일으키며 지역민심을 선동시킨 인물로 평가받으며 부정적인 정치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반면 한국의 산업화를 만들며 경제적 안정을 이끈 인물, 또한 민주주의 투표권으로 대통령을 선택하게금 만든 인물로 긍정적인 정치인으로도 인정받고 있다.

김 전 총리는 고 박정희 전 대통령 형의 딸과 결혼했다. 이에 김 전 총리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조카 사위다. 또한 김 전 총리의 부인이 박근혜 전 대통령 사촌 언니다.

김 전 총리는 지난 1926년 충남 부여에서 출생했다. 이어 김 전 총리는 공주중·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서울대 사범대를 다니다 육군사관학교에 입학 후 졸업했다.

김 전 총리는 1961년 처삼촌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5월 16일 일으킨 5·16 쿠데타에 가담해 군부 정권을 함께 세웠다. 이런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외친 당시 대학생들과 국민들을 무참히 짓밟기도 했다.

같은 해인 1961년 중앙정보부를 창설해 초대부장에 취임했으며 공포의 중앙정보부 지하실 고문장을 유지시킨 장본이기도 하다. 이어 박정희 전 대통령을 보필하며 영원한 제2인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군사 쿠테타로 정권을 장악한 후 1963년 공화당을 창당했다. 공화당 창당 후 정치권을 주도했으며 그해 치러진 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뒤 7대와 8대, 9대, 10대, 13대, 14대, 15대, 16대를 거치며 9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이렇게 군사 쿠테타로 정권을 장악한 김 전 총리는 막강한 권력으로 탄탄대로를 걷는 듯 했으나 공화당 창당과정에서 불거진 증권파동과 워커힐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 빠찡꼬 사건 등 4대 의혹사건에 휘말리면서 정치적 행보가 삐꺽거리기 시작했다.

김종필 전 총리, 한국 정치사 몸소 체험한 정치 9단<자료사진>

이에 증권파동과 워커힐사건, 새나라자동차사건, 빠찡꼬 사건은 군사정권 당시 고위층이 관련 있는 사건이다. 하지만 그 진상이 규명되지 못한 채 국민들에게 짙은 의혹만 남겨 놓았다.

증권파동은 5월 증권파동이라고도 한다. 1962년 5월을 전후하여 일부 증권업자에 의해 대한증권거래소 주식(일명 대증주) 등 주력주가 매점되고 주가조작을 겸한 투기가 과열되어 결재일에 가서 주식거래대금이 결재되지 못하여 일어난 사태다.

증권파동이 발생한 것은 1961년 말부터 시작된 대대적인 투기적 증권붐으로 부터 시작됐다.

증권붐은 5·16군사정변 이후 정부의 적극적인 증권시장육성책과 국영기업체의 배당률 상승전망 등에 힘입어 증권시장은 활기를 띠게 된 반면, 주식의 공급이 과소하여 주가를 자극하면서 부터 투기자금, 즉 유휴자금·대기성자금·사채자금 및 중소상공업자의 사업자금까지 증권시장에 집중되어 주식 수요증가가 주가를 계속 상승하게 만들면서 시작됐다.

이런 증권붐에서 그 당시 막후의 권력기관이었던 중앙정보부와 증권업자가 결탁하여 윤응상을 중심으로 통일, 일흥, 동명 등 3개의 증권회사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들은 증권거래소를 실제적으로 장악하여 무모한 주식매진행위를 감행, 주가를 폭등시켰지만, 결국 수도자금이 고갈되어 증권파동이 일어났다.

군사정부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금융통화위원회로 하여금 대출을 승인하게 하는 등 수습을 시도하였지만, 증권파동의 주역으로서 매진과 투매로 책동전을 벌였던 증권회사는 물론 일반의 영세한 투자자들에게도 엄청난 재산상의 손실을 가져다줬다.

워커힐사건은 주한 유엔군의 휴양지를 만들어 외화를 벌어들이겠다는 김종필의 착상으로 1961년 석정선 중앙정보부 제2국장 등이 주축이 되어 서울특별시 성동구 광장동에 워커힐호텔을 세우면서 일어난 사건이다.

이들은 당시 교통부가 워커힐호텔의 건설을 주관토록 조처하였고, 워커힐호텔 건설공사가 자금난으로 부진해졌다.

그러자 교통부 장관 박춘식과 관광공사 사장 신두영 등은 워커힐호텔 건설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정부주금 5억3590만9795원을 워커힐호텔 이사장인 임병주(당시 중앙정보부 제2국 1과장, 중령)에게 가불케 하여 워커힐호텔을 건립하게 했고, 그 과정에서 막대한 공작자금이 유용됐다.

더욱이 교통부장관과 각 군의 공병감들에게 압력을 가하여 각종 장비를 제공하게 하고 인력을 노역시키는 등 정부의 무리한 공권력행사가 행하여진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 사건으로 석정선·임병주·신두영 등이 서울지검에 구속되기도 했다.

김종필 전 총리, 한국 정치사 몸소 체험한 정치 9단<사진=김정환기자>

새나라자동차사건도 워커힐사건과 유사한 유형의 비리 사건이다. 1961년 10월,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의 특사자격으로 대만을 방문한 김종필은 대만 자동차공업의 발전상을 보고 우리 나라에도 자동차공업을 육성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같은 해 12월 한일회담을 위해 일본에 건너간 김종필은 재일교포 실업가인 야스타상사주식회사 사장 박노정과 만나 자동차공업에 대한 의견을 교환한 뒤, 그 회사 전무인 안석규를 국내로 불러들였다. 안석규는 당시 중앙정보부 차장보였던 석정선의 도움으로 우리 나라에 새나라자동차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정부에서는 400대의 관광용 자동차의 수입 및 판매를 새나라자동차공업주식회사에게 맡겼으나, 그 400대의 수입허가절차를 밟는 과정에서 석정선이 공권력을 남용하여 물의를 빚었다. 이에 1963년 4월 석정선 등은 업무상 횡령·협박·증여 혐의로 육군고등군법회의에 구속, 송치됐다.

빠찡꼬사건은 자유당이나 민주당정권하에서는 엄하게 금지되었지만 군사정권하에서 국내에 반입되어 세간의 의혹을 불러일으킨 사건이다.

1961년 12월 중순쯤, 재일교포 김태준 등이 세칭 빠찡꼬라고 불리는 회전당구대 100대 등을 부산항에 탁송하고 통관에 필요한 귀국증명서 1통을 위조해 재일교포 재산의 국내 반입인 것처럼 속여 국내에 들여왔다.

군사정부의 계엄통치하에서 도박성이 있는 빠찡꼬가 횡행하자 세간의 여론이 비등해졌다. 이에 당국은 회전당구장 영업허가를 취소하기에 이르렀고 김태준 등은 관세법위반의 혐의로 1963년 3월 수도방위사령부 보통군법회의에 송치됐다.

제3공화국이 들어서기 직전 한동안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4대의혹사건은 1963년 12월 민정이양이 실시되자 국회의 국정감사까지 받았던 사건이다. 하지만 엄청난 자금의 행방은 끝내 밝혀지지 않은 채 역사의 흐름 속에 묻혀 버렸다.

결국 김 전 총리는 중앙정보부장이라는 막간한 권력을 가진 채 이런 4대 의혹사건으로 외유의 길을 떠난다. 4대 의혹사건들은 1964년 초 제3공화국의 국회에서 야당 측의 정치공세로 국정감사까지 받았다.

하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군사정권인 만큼 김 전 총리는 곧 귀국해 같은 해 치러진 6대 총선에서 고향인 부여에서 당선됐고 이어 공화당 당의장에도 임명되며 정권의 정면으로 부상 막강한 권력의 중심자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김 전 총리는 또 다시 발목을 잡히며 휘청거리게 된다. 김 전 총리의 발목은 잡은 것은 다름 아닌 외교 파동이다.

1962년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의 쟁점이던 대일 청구권 문제와 관련해 이른바 김-오히라 메모가 뒤늦게 공개되면서 굴욕외교를 비판하는 6.3사태가 일어났다.

김종필 전 총리, 한국 정치사 몸소 체험한 정치 9단<사진=김정환기자>

김 전 총리는 굴욕외교라는 비난속에 1964년 또 다시 2차 외유를 하게 된다. 하지만 오뚜기 같이 정치 인생을 걸었던 김 전 총리는 역시나 다시 일어나며 1971년부터 1975년까지 4년 6개월 간 국무총리를 지내며 또 다시 2인자로 정권을 잡는다.

당시 국무총리는 대통령의 지시를 받으며 외교 업무를 수행하지만 정치권을 장악하는 작업이 우선이었다. 하지만 김 전 총리는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당시 중앙정부부장의 총탄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더욱이 1980년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의 신군부 등장과 함께 권력형 부정축재자 1호로 몰려 구속되며 정치적 시련을 겪는다. 이어 김 전 총리는 1984년 미국으로 건너가 유랑생활을 하다 1986년 귀국한다.

김 전 총리는 귀국 후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1987년 13대 대선에 출마했다가 낙선하며 다시 움크리는 생활을 하게된다. 하지만 1988년 13대 총선에서 충청 민심의 지지기반으로 35석의 국회의원 의석수를 확보하며 화려하게 국회로 재입성한다.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서며 정치 일선에 복귀한 것이다. 이어 1992년 대선에서 평생의 꿈인 내각제를 고리로 3당 합당에 참여해 김영삼(YS) 당시 대선 후보를 지원했으나 내각제를 관철하지는 못하며 차기 대통령의 꿈을 다시 접어야 했다.

김 전 총리는 1997년 대선에선 자신이 창당한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다시 대권에 도전하지만 내각제를 항상 생각했던 터라 선거 막판에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을 성사시키고 김대중(DJ) 당시 대선 후보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며 DJ(김대중)를 대통령에 당선시킨다. 이를 통해 민주주위 투표로 인한 첫 수평적 정권교체와 함께 국민회의와 자민련 공동정권을 만든다.

하지만 내각제 파동으로 16대 총선 과정에서 공동정권의 세 싸움으로 앙금에 대립각까지 생기면서 공조파기까지 되는 갈림길로 나눠진다. 여기에 2001년 9월 임동원 당시 통일부 장관 해임안 가결이 되면서 공동정권은 완전히 붕괴된다.

이어 김 전 총리는 2004년 17대 총선을 통해 비례대표 등으로 다시 국회에 입성을 시도했으나, 4명의 의원만 당선시키며 10선 도전 실패와 함께 참패를 당한 뒤 정계은퇴를 선언한다.

결국 김 전 총리는 이런 한국 정치의 긴 세월 제2인자로 정치길을 걷다가 이날 오전 8시15분 서울 중구 신당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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