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일보] 좋은 글은 읽는 이에게 생각할 거리를 준다. 좋은 희곡 역시 그렇고, 그 활자들이 무대에서 살아 숨쉬게 되는 좋은 연극도 마찬가지다. 생각거리를 던지고, 어떤 여운을 남기고, 이상한 쓰라림과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연극 <실비명>도 그랬다.

역사 속 여성 인물 중심의 작품들을 지속해서 올렸던 정복근 작가의 ‘실비명’은 서울연극제의 수상작임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올라오지 않았다. 왜 이 연극은 지금 다시 올라와야 하는가? 우리는 굳이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까?

실비명, ‘잃어버린 묘비명’이라는 제목은 희한하게도 소리조차 마음껏 지르지 못하는 ‘실비명’을 떠오르게 한다. 이 극의 등장인물 중 완전한 악은 없다. 가해자는 사라졌는데 피해자는 남아 있다. 그들은 서로의 도피처가 되었다가도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상대를 이해하면서도 끊임없이 부인하고 부정한다. 어떠한 ‘사건’ 이후 그들은 살아남았으나, 살아가기가 쉽지는 않다. 꾹꾹 눌려 있던 죄책감은 오히려 칼날이 되어 상대를 할퀸다. 할퀴어진 상대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과 같은 피해자, 상처에서는 피가 흐르고 흉터는 짓무른다. 연극은 끝내 치유되지 못하는 ‘그들’의 삶을 이야기한다.

연극 <실비명>, 이토록 쓰라린 이야기

연극집단 무공연마가 쟝 주네의 <하녀들>에 이어 두 번째 작품으로 <실비명>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흔치 않은 선택이다. 기자는 극이 끝난 후 조명균 연출과 <실비명> 팀의 배우들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함께 공부하고 공유할 수 있는 작품을 선택했다.” 조명균 연출가는 그렇게 대답했다. “각각의 입장에 따라서 얼마나 입체적인 인물을 그려낼 수 있는지, 그래서 살아난 그 인물들이 어떻게 서로를 대하게 되는지를 보여 드리고 싶었다. 누구도 완벽한 선이고 완벽한 악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가장 드러내고 싶었던 건 그 안에서 소외되는 인간들의 모습이다.”

배우들의 인터뷰도 인상 깊었다. 얼마나 극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고 연구를 했는지 드러나는 부분이다. 김주원 배우는 “‘실비명’은 결국 치유되지 못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라고 말했다. 위자현 배우가 “맡은 역할이 ‘실비명’ 이라는 극이 끝나도 포기하지 못하는 어떠한 것들이 있다. 결국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못할 것 같다.” 는 대답을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민상오 배우는 “30년 전에 쓰여진 작품이 지금 시국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연습을 하면서도 참 안타까웠다. 그래서 오히려 원작의 글을 그대로 담아 오고 싶었다.” 고 대답했다.

조재현 배우는 “남은 공연 기간이 길다. 4월 28일까지인데, 매번 색다른 감동을 느끼고 있는 우리처럼 관객분들에게도 그 감동이 전달되었으면 좋겠다.” 고 말했다. 연극 <실비명>은 4월 5일부터 4월 28일까지 뜻밖의 극장에서 공연된다.

연극 <실비명>, 이토록 쓰라린 이야기

연극은 시대를 비춰주는 거울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관객이 없으면 결국 완성되지 못한다. 연극 <실비명> 역시 그렇다. 한 번쯤은 보아도 아깝지 않을 극이었으며,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참 슬픈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게 되는 극이었다. 그러나 바위는 언젠가 계란으로 뒤덮일 것이다. 극 중 정우의 말처럼. “고개를 들고 일어서서 모든 어리석음에 대해서 화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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