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봉은 공산주의 혁명가<사진=TV방송화면캡쳐>

[노동일보] 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에서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되어 마침내 민족의 독립운동 역량을 결집했다", "통합된 광복군 대원들의 불굴의 항쟁 의지와 군사적 역량은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되었다”고 언급하여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헌정회 기관지 [월간 헌정] 7월호에 게재된 김원봉 선생 일대기를 요약 보도한다. 김원봉 선생에 대한 정부 서훈이 바람직한 지 현충일 추념사 언급이 적절한 지에 대한 판단의 참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약산 김원봉은 1898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3.1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 의열단을 창설하고 1920년에는 단장이 되었다.

1926년 중국 국민당의 황포군관학교에 들어갔고 졸업 후 교관이 되었다. 1927년 의열단은 중국 국민혁명에 가담하게 된다.

김원봉은 1929년 조선공산당 재건동맹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 의열단의 명칭을 무산자전위동맹으로 개칭하고 공산당 운동을 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의열단을 부활시켰고 1932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에 참여하였다. 1934년 모든 혁명단체를 해산하고 통일동맹에 귀속하자는 결정에 따라 1935년 7월 독립운동단체 9개를 묶어 민족혁명당을 결성하였다.

이 때 김구 선생은 임정을 고수하였는데 김원봉이 김구 선생에게 임정 해산을 종용하였다. 1938년 무한에서 장개석의 지원을 받아 조선의용대를 결성하고 대장에 취임하였다.

조선의용대는 좌익인 최창익 부대와 김원봉 부대로 분렬하였는데 최창익 부대는 중국 공산당 팔로군에 편입되었다가 후에 조선의용군으로 북한군의 주력이 되었다.

김원봉은 1940.9 지청천이 이끄는 광복군 창설에 참여하였다. 1941년 조선민족혁명당은 임시정부 참가를 결의했고 김원봉의 부대는 광복군 제1지대에 편입되었다.

김원봉은 1945년 11월 조선민족혁명당 대표부의 일원으로 김규식과 함께 귀국하여 남한에서 사회주의 운동에 몰두하였다. 그는 신탁통치를 찬성하고 민주주의민족전선의 공동의장이 되었다. 1946년 민족선전을 인민공화당으로 개칭하였다.

1947년 좌익단체폐쇄령이 내려져 활동무대가 없어지자 1948년 4월 제정당연석회의 참석차 월북하여, 8월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선출되었다. 9월에는 내각 국가검열상 (서열 7위)에 올랐고 1950년7월 공화국 남반부해방지역군면리인민위원회선거중앙선거지도부 수석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52.3 군사위원회 평안북도 전권대표가 되었으며 북한의 공화국 훈장을 수여받았다. 1952.5 북한의 노동상에 임명되어 전시 동원과 무기 생산을 담당하였다.

1957년까지 내각의 일원으로 일했다. 1958년 10월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에서 해임되었고 11월에 장제스의 국제간첩으로 몰려 숙청되었다.

김원봉이 탁월한 반일 무장 독립운동가였고 광복군 형성에도 참여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공산주의자였고 북한정권에 참여하여 고위직에 있었으며 6.25 전쟁 중에는 병참활동과 남한 해방계획책임자였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대한민국의 보훈 대상자가 되에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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