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일보] 문화유산회복재단(회장 조의연)은 21대 국회 개원에 맞춰 돌아온, 돌아와야 할 문화유산 사진전을 개최한다.사진전에는 그동안 환수한 문화유산과 앞으로 환수해야 할 문화유산의 사진과 함께 각 유산이 지닌 가치와 사연도 함께 소개한다.사진전은 11일 오전 10시 30분, 국회의원회관 1층 로비에서 개막해서 15일까지 진행되며 행사 주최는 정은혜 국회의원, 주관은 충남도국외반출문화재실태조사단(단장 김연)이 함께 한다.이번 사진전에는 남북공조로 환수한 북관대첩비, 귀국했지만 귀향하지 못한 지광국사탑, 미완의 반환 외규장각의궤 등 환수된 문화유산과 백제미소불, 의방유취, 고려불화, 혼천도 등 환수해야 할 국보급 문화유산 30여 점이 소개된다.조의연 문화유산회복재단 회장은 "광복이후 1만여점의 문화재를 환
[노동일보] 일제강점기에 조성한 대표적인 도시가 인천,부산,군산,대전,목포이다. 인천은 가장 먼저 개항, 침략의 거점을 삼았다. 부평에는 전국에서 징발한 쇠붙이로 무기를 만드는 병기제조창이 있었다. 징발은 중국에서 있었고, 그때 들어 온 중국 범종이 인천시립박물관하고 전등사에 있다.부산은 시모노세키항까지 운행하는 관부연락선에 징용노동자를 실어 날랐다. 부산에 일제강제징용역사관하고 강제노동자동상이 있는 이유이다.군산은 곡물수탈항구였다. 군산에는 지금도 곳곳에 일제의 유산이 남아있다. 대표적인 곳이 동국사이다. 인상적인 점은 일본 불교계의 한 종파인 조동종에서 침략과 수탈을 참회하는 '참사문비'가 있다.대전은 영남과 호남이 마주하는 교통 중심지로 개발되었다. 대전역에서 옛 충남도청까지 이르는 중앙
[노동일보] 일본소재 한국기원문화유산 탐방단은 수차례 일본 큐슈지역을 탐방하였다. 그 중에 2015년 12월에는 일본 나고야성 박물관을 탐방하였다. 그 날은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려 다소 을씨년스런 분위기였고 그래서인지, 이른 아침 찾은 박물관은 탐방단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탐방단은 한반도에서 유래된 여러 유물과 역사적 기록을 살피다가 박물관 중앙에 있는 수월관음도 앞에 일제히 발걸음을 멈췄다. 우선은 사람 크기의 약 2배에 이르는 압도적 크기와 섬세한 표현, 그리고 성화(聖畫)로서의 경건함이 대중을 사로잡았다.언제 누가 왜 조성하였고, 이 자리에는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당연하다.안내문에는 이렇게 적혀있다.진품은 현재 큐슈
[노동일보] 문화유산의 보전과 가치 창달, 미래세대 전승에 노력하는 문화유산회복재단은 프랑스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에 대해 위로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에는 전세계인과 함께 슬픔을 함께하고 위기 극복을 위해 함께할 것을 약속하는 내용이다. 문화유산회복재단은 회원들의 성금을 모아 문화유산회복재단 프랑스 지부(책임연구원 김나래 박사)를 통해 프랑스 정부에 전달 할 계획이다. 아래는 성명 전문이다.[세계문화유산 노트르담 대성당의 화재 위로 성명]여명을 밝히는 새벽의 뉴스가 이처럼 충격적이고 참담할 수 있습니까?2019년 4월 16일,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는 전 세계 문화인에게 깊은 슬픔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럼에도 파리의 소방관과 시민들에게 의해 화재는 조속히 진압되고 간절한 ‘인간 사슬’로 유물이 지켜졌다는
[노동일보] 하늘을 알면 천하를 얻는다옛 선인들도 지금의 기상청처럼 빅데이터 분석을 했을까? 궁금한 대목이다.우리와 같은 농경사회의 기본은 공동체이다. 공동체를 이끄는 힘은 미래를 예측하여 오류를 되풀이하지 않은 것이다. 이 점에 있어 갈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하늘 세상을 분석하는 일은 지도자에게 있어 너무나 가혹한 일이지만 해야 할 숙명이었을 것이다.인류는 오랜 시간에 거쳐 하늘의 변화를 주목하고 태양과 달, 별의 움직임을 관찰하면서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기록으로 남긴 이유는 오류를 되풀이하지 말고 미래를 대비하자는 뜻이다. 대표적인 기록이 달력이다.기록의 중요성은 점차 중요해져서 천문 기록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생활양식을 남기고 역사를 기록하고 문화와 풍습을 남겨 미래에 전달되었다.이런 점에 있어서
[노동일보] 고려 민초들의 신앙결사체, 부석사관음상서산 부석사금동관음상은 기구한 운명을 타고 났다.1330년 고려의 국운은 쇠락하고 왕실은 타락을 거듭하여 힘없는 민초들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을 터. 고려의 조그만 마을 서주에는 작은 등불이 켜졌다. 신분을 뛰어 넘은 32명의 민초들은 평등세상 구현을 꿈꾸며 그 간절한 염원을 관세음보살에 담았다. 이 관세음보살이 영원히 부석사에 존재함으로 그들은 내세에서도 의지처가 되리라하는 서원을 굳건히 하였다.고려의 불사(佛事)들이 대부분 왕실과 귀족, 고승에 의해 발원되고 이뤄진 바와 달리 유일하게 민초들의 염원을 담은 관음상은 영원히 부석사에 있을 것이란 서원과 달리 잦은 왜구들의 침입과 약탈로 인해 머나먼 섬, 대마도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 시기가 135
[노동일보] 일본의 교토, 오사카, 나라에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흔히 마주한다. 교토 교류지(광릉사)의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 대표적이다. 지금은 문화재 서열화 문제로 번호가 폐지되었다지만 일본 국보 1호의 지위를 오랫동안 유지하였다. 나라 현의 호류지(법륭사)는 고구려 담징이 그린 금당벽화와 백제관음상이 있는 곳이다.고대 역사이래로 한반도에서 전래된 문명을 바탕으로 ‘아스카 문명’ 등 자신만의 문화를 이뤄 온 일본이다. 그러나 문명의 전달 과정은 늘 협력적이지 않았다. 그 분기점은 7세기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맞선 백제와 일본국과의 연합군이 전투에서 패한 이후라 할 수 있다. 백제와의 연합 전투에서 패한 일본국은 신라의 침공을 방어할 목적으로 대마도에 금전성(金田城)을쌓으면서 이전과는 다른 양식의 성
[노동일보] 프랑스 군이 조선을 침략한 병인양요가 일어난 지 153년이 지났다. 당시 강화도 외규장각에 있던 조선 왕실의 보물들이 대거 약탈당하고 불에 탔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인 조선왕실의궤이다. 이 의궤는 분산 보관한 다른 것과 달리 어람용으로 그 가치가 남다르다.박병선 선생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외규장각의궤를 발견한 것은 1975년이다. 약탈한 프랑스 정부는 선생이 발견하기 전까지 중국서책으로 취급하며 창고에 쳐 박혀 두었다. 의궤의 소장 사실을 발표하자 파리 도서관은 박 선생을 내쫓았다. 문화재 약탈국가로 낙인찍히는 것이 두려웠을 것이다.약탈당한 의궤가 프랑스 도서관에 있다는 사실이 국내에 알려지자 돌려받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한국인에 있어 기록문화는 특별하기 때문이다. 세계 문자연구가인 제프리 샘
[노동일보] “한국은 약탈한 문화재가 없나요?”“한국인이 문화재를 돌려받으려면, 한국에 있는 외국 문화재도 돌려줘야 하지 않나요?”종종 듣는 물음이다. 최근에는 서산 부석사금동관음상 인도소송과정을 진행되다 보니 더 자주 듣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없다. 서산 부석사금동관음상은 한국인이 절취한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 댓가로 혹독한 형사처벌을 받았다. 다만 현재 진행하는 인도소송은 소유권을 가진 부석사가 처분권을 가진 한국정부를 상대로 소유권을 인정해달라고 소송을 진행 중이다.일본의 대마도 관음사가 정당하게 취득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하지 않으면 일본으로 환부하는 것은 국제적인 원칙과도 맞지 않는다.여기서 잠깐, 사회 일각에서는 대마도 관음사가 정당하게 입증하지 못하는 사유를 ‘오래된 세월 탓’을 들면서 그건
[노동일보] 독일 남부 대표 도시 뮌헨(Munich), 인구 140여만 명이 살고 있지만 가을에 열리는 옥토버페스트(Oktoberfest) 축제에만 600만 명이 찾는 명소이다. 이곳의 중심지에 고딕 양식의 뮌헨오대륙박물관(Five Continents Museum, Munich) 있다. 문화유산회복재단 조사단은 2018년 10월, 이곳을 방문하면서 특별한 우의를 나눴다.여정의 시작은 이렇다. 독일 남부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는 1920년대 금강산 등을 찾은 노르베이트 베버 신부가 수집한 ‘조선의 유물’이 1천여 점에 달했다.그 중에는 당시 조선 사회를 볼 수 있는 무성 영상 필림도 있다. 이를 조사하고 정리한 김베이커 영자 교수는 수도원 내에 한국 갤러리를 개관하는데 산파역할을 다했다. 수도원박물관은 겸재정
[노동일보] ‘고아 문화재’ 아직도 상당수 있어일본인이 강탈해간 원주 지광국사탑이 돌아온 지, 100년이 지났다. 그로부터 1만여 점의 문화재가 귀국했지만 중요 문화유산의 상당수가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일부에서 환수보다 현지 활용이 중요하다며 환수 활동을 소탐대실이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이런 주장의 뿌리는 일제의 논리와 맞닿아 있음을 종종 확인한다.65년 한일문화재협상에서 일본정부의 입장은 정당한 수단으로 입수하였으므로 반환할 의무가 없지만 한국 국민이 불쌍하므로 기증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정부가 4,400여점을 반환하라 했지만, 1/3만 기증한다. 그리고 이것으로 끝이다, 라는 것이다.정상적이고 다소 불법적이라도 보관을 잘하고 있으니, 이젠 현지에서 ‘홍보대사’역할을 잘 수행하면 다행이라는
[노동일보] 선봉사지(僊鳳寺址) 칠층석탑 두 번째는 이곳에 있다가 거처 없이 떠도는 고려 석탑 때문이다. 선봉사칠층석탑은 기구한 사연을 지니고 있다. 명칭 선봉사지 칠층석탑. 고려 초기인 11~12세기 제작된 높이 2.3m로 1960년대 석조물 전문가인 진홍섭· 정영호 교수가 국보급이라고 밝혔다는 내용이 1964년 신문보도에 있다. 연꽃 무늬가 아름다운 독특한 양식의 석탑은 선봉사가 폐사한 이후 인근에 방치되어 있다가 창랑 장택상(1893~ 1969) 전 국무총리가 수습하였다고 한다. 장택상은 일제강점기 문화재 수집가로도 이름이 높다. 이후 60년대에 셋째 딸 장병혜의 집으로 이운하였다. 이 석탑이 유명해진 계기는 이렇다. 1963년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서거하자, 장택상은 칠층석탑을 미국의 알링턴 국립
등재 보류, 무산위기에서 구원한 한국정부의 합의 국제사회의 반대여론에 봉착하면서 7월 4일 심사가 보류됨으로 등재가 무산될 수 있다는 애기가 한국 언론보도에 나왔습니다. 등재저지단은 기쁨에 들떳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오후, 일본 유산 심사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한국정부가 등재에 합의했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등재 저지단은 총회장 앞에서 더욱 격렬히 반대하였고 중국대표단이 자신들을 대신하여, 총회장에 와서 연설하라는 요청도 있었습니다. 결국 한국정부의 합의아래 아베 정부가 역점적으로 추진한 은 등재되었고, 한국정부가 발표한 것과
[노동일보] 서울 용산에 있는 국립박물관 4층 전시실에 가면 압도적인 불상이 있다. 보는 사람 눈높이의 두 배에 이르러 시선이 멈춘 곳에 다소 근엄한 표정의 불상이 아래를 굽어보고 있다.서산 보원사지에서 있던 철불 여래좌상이다. 높이 257㎝, 무릎 너비 217㎝ 크기이다. 조성 시기는 여러 학설이 있지만 신라 말기 고려 초기로 보는 견해가 많다. 보원사에 주석하였던 탄문스님이 고려 광종 즉위년인 949년에 석가삼존금상을 조성하고, 또 광종 6년에는 왕의 만수무강을 위하여 삼존금상을 주조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이 시기에 조성하였다는 것이다.사람 두 배에 이를 정도의 거대 불상을 쇳물을 부어 만들었다는 것은 당시 하이테크(Hi-Tech)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거기에다 섬세하고 정교한 수준을 감안하면 예술적,
[노동일보] 만세운동 100주년이다. 1919년,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여 전 민족이 '대한독립만세'를 목놓아 외쳤다. 이 운동의 핵심은 3.1이 아니고 '만세'이다. 알려진 바와 같이 3월 1일 말고도 중국과 일본에서 이미 조선독립선언문이 채택되고 만세를 불렀다. 전국적 항거는 그 이듬해애도 이어졌고, 독립운동은 이를 기점으로 본격화되었다. '만세'는 봉건제에서는 황제국의 상징이다. 근대에 와서는 독립자주의 상징이다. 우리는 조선에 와서는 '만세'를 칭하지 못했다. 임금 앞에 '천세'라 부르는 것이 전부였다.'만세'는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중국의 무력화와 일본의 침략 야심이 본격화되던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되면서 가능했다